경훈이
경훈이는 나의 소중한 보물이다. 세상에 하나뿐인 나의 거울이다.
이런 경훈이가 사랑받고 싶은 욕심이 많다. 뭐든지 1등을 하고 싶고, 인정 받고 싶어 한다.
그게 맘대로 되지 않으면 짜증을 내고 , 분노 조절을 잘 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일요일
오랜만에 장시간 운전을 하고 왔더니 몸이 피곤하다
새벽에 나가서 오후 2시쯤 들어와 가볍게 피자를 먹고, 아이들과 오산천 산책을 하고 오는 길이다
평일이고, 휴일이고 집안 일은 거의 돕지 못하기 때문에 그나마 아이들 데리고 집에서 나가주는 게 안혜에게도,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거의 집에 있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 집에 들어온 게 오후 5시
사실 가볍게 씻고 과일 좀 먹고 또 나가려 했지만 안혜가 말렸다
- 애들도 피곤할 텐데 집에서 좀 놀아줘
그래서 하게 된 게 윷놀이
내가 경훈이에게 다짐을 받아 놓은 것은 규칙을 지키지 않고 이기는 게임은 의미가 없다는 것. 그리고 지더라도 승자에게 박수를 쳐 줄 수 있어야 한 다는 것. 아빠는 규칙을 어기고 이기는 경훈이보다 규칙을 지키고 지는 경훈이가 더 좋다는 것. 이기던 지던 상관없이 노력하는 경훈이에게 박수를 쳐 줄거라는 것 등 이미 수차례 이야기 해 둔 바 있다
시작부터 나의 윷이 분위기가 좋다
말 4개 중 이미 2개를 내 놓고 이제 2개만 남은 상황. 경훈이는 아직 4개가 모두 말판에 남아 있다. 하지만 이래저래 꾸물되는 사이 경훈이가 2개씩 업어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상황은 점점 막상막하로 치닫고, 한 번의 윷놀이로 승부가 결정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내가 도 또는 개를 하면 경훈이가 이기고, 걸을 하면 내가 이기는 숨 막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나도 모르게 (정말이지 나도 모르게) 장난기가 발동하면서 막 혼자서 주문을 걸라치니까
- 아빠! 그런거 하지 마요!
높이 오른 윷이 한바탕 뒤엉키면서 내게 보여준 암호는 '걸!!'
- 걸!!!
나도 모르게 (정말이지 , 진짜로 나도 모르게) 손을 번쩍 들며 소리질렀다. 그러자 경훈이가 갑자기 서러운 울음과 괴성을 터뜨린다. 정말정말 서럽게도 운다. 승부를 인정하기 싫은 듯 소리를 질러 대며 안방으로 건너가 울기 시작한다. 나도 내 방으로 건너온다. 열심히 울다가 설움이 덜 풀렸는지 혼자서 말판과 윷을 들어 안방으로 들어가 윷놀이를 시작한다. 혼자서 중얼대며 윷을 던진다
경훈이는 아빠를 이기고 싶었다. 아빠라는 큰 도전에서 성공하고 싶었다. 열심히 잘 따라갔지만 막판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 슬픔이 너무 컸다. 안혜라도 곁에서 또닥여 주면 좋았겠지만 안혜도 이미 경훈이 짜증에 질린 지 한참이다.
마음이 불편하지만 .. 어차피 이것또한 경훈이에겐 하나의 '자극' 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수많은 자극을 주는 것 뿐. 물론 격려하고 응원한다. 경훈이는 잘 할 수 있다는 걸 난 잘 알고 있다.
내 전성기는 초등학교 때. 그 때 만약 우리 부모님이 나를 사랑가득한 시선으로 격려하고 응원해 줬다면.. 물론 이런 후회는 이제는 더이상 하지 않지만 정말 그런 생각이 들긴하다. 동생이 왜 고등학교에 가서 학업을 놓았는지.. 오직 나밖에 몰랐던 어린시절이 떠올라 가슴이 애린다.
다음 날 아침
경훈이와의 한글놀이. 원래는 축구 골대를 만들기 위한 플라스틱 모형인데 어쩌다 보니 한글놀이로 활용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한 글자를 불러 주면 (예를 들어 '가' ) 경훈이가 뒤에 또 하나의 글자를 붙여 단어를 만들어 낸다. 한 글자당 두 단어씩 경훈이가 신나게, 재밌어했다. 그런데 문자는 '가' . 처음에 하나는 가위. 너무 잘했다.
그 다음 글자가 '가사'
그래서 물었다
- 경훈아! '가사' 가 뭐야?
- 그거 ..이렇게 쪼이는 거
- 아!! 나사?
이 때 부터 경훈이의 짜증이 시작된다. '나사' 라고 써 있는 책을 들이 밀어도 경훈이는 '가사' 라고 우겼다. 잘못된 걸 맞다고 할 수 없는 노릇이니 '나사' 라고 말해줬고, 경훈이는 성질을 내기 시작했다. 결국 뽀뽀도 못하고 출근하는, 참 드문 날이 되고 말았다
기질 임을 인정하고 충분히 안아주려 하지만, 내 그릇이 작고 어설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