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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훈이와의 대화
    나의 이야기/일기 2013. 5. 7. 20:46

    일요일 오후

    장모님을 편히 쉬시게 하지 못할 걸 뻔히 알면서도 보문사를 다녀온 후 집이 아닌 장모님 댁을 다시 찾았다

    예의가 아님을 잘 알면서도 그러고 싶었다

    내가 편하고자 함은 결코 아니였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은 욕심이다

     

    오후 3시

    경훈이와 장모님 댁 뒤편에 있는 약수터로 향했다

    야트막한 뒷산에 있는 약수터까지 경훈이와 함께 간 다면 1시간 정도가 걸린 듯 싶었다 그렇다고 평평하지 만은 않은 땀이 날 정도의 코스 였다

    게다가 경훈이는 새벽에 3.2km 조깅과 오전 보문사 마애불 석상의 높은 계단까지 다녀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욕심이 생겼다

    경훈이와 단 둘 만의 시간

    뻔히 알고 있다. 분명히 중간에 다리가 아파서 내가 경훈이를 목에 매달고 와야 할 것을. 하지만 그러고 싶었다. 2년 전 캠핑카 여행 중 백련사에서 다산초당까지 경훈이를 목에 매달고 걸었던 800m. 아빠의 목 위에서 잠을 청하던 경훈이의 모습. 그런 생각이 나를 이끌어 준 힘이었다.

     

    나 : '경훈아.. 아빠가 일을 해서 예체능단에 수영 구경 못 가도 너무 실망하지 마'

    경 : '응. 아빠가 보고 싶을 때 오면 되지'

    나 : 그래, 아빠가 가끔 몰래 가서 볼께

    경 : (함박 웃음)

     

    수영을 하며 나를 발견하곤 너무나 애틋하게 손을 흔들던 경훈이의 모습.

     

    약수터를 가기 전에 남문 (이번에 갔더니 '남장대' 라고 되어 있었다) 이라는 곳이 있는데 성곽을 따라 꼭대기에 올라서 성에 가자고 한다. 물론 오늘은 너무 힘들어 안 된다고 하니 다음 번에 꼭 가보자고 한다.

     

    나 : 위에 성에 가면 누가 살고 있을까?

    경 : 아...왕자님과 공주님이 살고 있지. 그리고 마녀도 있지?

    나 : 마녀는 낮에는 잠을 자고 깜깜한 밤에만 활동하지 않을까?

    경 : 당연히 그러지.

    나 : 그럼 갑자기 마녀가 나타나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경 : 아... 그럴 땐 한 번에 할머니 집까지 갈 수 있는 로켓 미끄럼틀이 있음 좋겠다. 근데 그게 저 위에 성에 있대

    나 : 그래? 그럼 그 로켓 미끄럼틀은 누가 만들었을까?

    경 : 아... 그건 000 이 만들었지 (정확히 누가 만들었는지 못 알아 들음)

    나 : 그럼 그 사람은 몇 살일까?

    경 : 6살이지

    나 ; 그래? 그렇게 어리다구. 정말 대단하다. 6살이 혼자서 로켓 미끄럼틀을 만들었다구?

    경 : 아.. 12살이야. 12살되면 혼자서 만들 수 있지

    나 : 그럼 우리 다음 번에 꼭 저 위에 성에 올라가보자

    경 : 그래. 그럼 우리 내일 올라가 보까?

    나 : ....

     

    약수터에 가서 물을 마신다

    경훈이는 항상 약수터에서 물을 마실 때면 '정말 맛있다' 는 말을 연발한다

    곁에 있는 할아버지들께 방울토마토를 하나씩 드리고, 물을 마시며 잠시 쉬려고 하니 경훈이가 곁에 있는 2층짜리 원두막 (정자 같기도 하고) 에 올라가서 쉬자고 한다

    나무 계단을 따라 올라가 보니 아래쪽에서는 안 보이고, 경치도 좋은 명당이다

    애라 모르겠다. 그냥 누워 버린다

     

    나 : 경훈아.. 아빠 팔에 누워

    경 : (함박 웃음을 지으며 신나게 눕는다)

    나 : 경훈아.. 진짜 좋다. 여기 이름을 지어 볼까?

    경 ; 그래... 그럼 '나무집' 이라고 하자

    나 : 나무집? 좋네.. 그럼 우리 다음 번에 왔을때도 나무집에 와서 이렇게 누워 있자. 좋지?

    경 : 응. 좋아. 근데 저 위에 지붕이 조금 있으면 막 빙글빙글 돌을 거에요

    나 : 애?

    경 : 아... 조금 있으면 비가 오는데 그럼 저 위에 지붕이 돈다구요

    나 : 진짜? 그럼 빨리 가야 겠다. 비 오면 옷 다 젖고 감기걸리면 안되잖아

    경 : 아... 여기 계속 있으면 되지요.

    나 : 그럼 깜깜해질 때까지 비가 와서 돌아갈 때 길을 잃어버릴까봐 그러지

    경 : 아.. 아빠는 그것도 모르냐. 내가 계속 표시를 해 둬서 갈 수 있지

    나 : ....

     

    어김없이 경훈이를 머리에 올리고 돌아오려니 남은 길이 1.5km 정도 된다

    한숨 대신 웃음

    이런 게 행복일테다

     

    경훈이는 나를 꼭 잡고 어떤 표정일까?

    그걸 상상하며 집에 오니 어느새 5시가 다 되어 간다

     

    이런 경험을 하게 해 준 건

    오롯이 장모님과 아내의 배려 때문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경훈이와 경연이에게 줄 수 있는 건 오직 이런 경험 뿐이다

    내가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이 것 뿐이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게 겨우 이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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