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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나의 이야기/관심사 2012. 8. 27. 13:35
오늘 한겨레 신문에 아래와 같은 기사가 났다
정말 독립기념관이라는 곳을 언제 가보고 관심을 끊었던지...
언젠가 기억도 안 나지만 .. 암튼 소풍 땐가 한 번 들른 적은 있는 거 같은데..
지금 생각하면 왜 갔었는지.. 뭐하러 갔었는지 조차 기억이 없다
어느덧 나이가 들어 아이가 생기다 보니 이제는 정말 꼭 가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년이면 큰 아이가 6살이 되는데...
8/15 광복절을 앞 둔 주일 정도에 꼭 찾아봐야 겠다
동시에 아래 기사에 있는 나무도 꼭 보고 와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내겐 50년 된 느티나무는 아니지만 저보다 더 소중한 행운목 하나가 있다
아내를 만나면서 선물로 줬던 , 그 당시 2000원 인가 하던 행운목인데..
그 놈이 어느새 10년이 지나 올해 꽃을 피우고 이렇게 당당하다
(내가 샀던 순간에는 저 큰 행운목 아래 너무나 초라해 보이는 저 녀석 정도 됐을 것이다 ㅎㅎ )
저 느티나무가 가치 있는 이유는 50년의 시간과 그 시간을 함께한 누군가의 노력이다
내게 이런 행운목이 곁에 있다는 것은 정말 너무나 큰 행운이자 영광이다
전두환·이명박 부끄럽게 하는 나무 한 그루
수천억짜리 건물 vs 나무 한 그루, 결과는?기사전송 2012.08.26 12:57광복절 즈음이면 독립기념관에 가곤 한다. 지금까지 이 건물에 여남은 번은 간 듯하다.
독립기념관의 거대한 ‘겨레의 집’이다. 기념관 관람은 이 건물을 통해 전시장으로 이어진다.
이 건물 바로 옆에는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공간이 있다. 넓은 분수 광장이 멋대가리 없이 펼쳐지는 곳이다.어느새 많이 자란 나무들이 이젠 자리를 잡은 저 옆 정원 속에 한 나무가 있다.
보기만 해도 눈길이 절로 가는 특별한 나무다.바로 저 동그란 나무다. 크고 웅장하다. 가지들은 균형잡혀 퍼졌고, 그늘 아래 나무 벤치도 있어 절로 쉬어가고 싶어진다.
그런데 저 나무,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가까이 다가가면 비로소 이 나무의 특별함을 실감하게 된다. 나무의 기둥이 마치 조각작품처럼 기묘한 모습이다.
굵은 가지들은 얽히고 꼬여 마치 나무 아래가 바구니나 광주리처럼 보일 정도다.
분명 따로따로 솟은 가지였을 텐데, 가지들은 하나로 붙고 다시 나뉘면서 나무에 커다란 구멍들을 만들어놓았다.가지들이 붙은 저 모습은 아름답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자연 상태에서 볼 수 없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연에 개입하고 자연을 사람 마음대로 변형하는 것을 싫어하는 분들이라면 기분이 나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특별하고, 근사한 것은 사실이다.
도대체 이 나무는 뭘까? 누가 이렇게 기묘한 모습으로 만들었을까?
한 소년이 있었다. 충남 서산에 사는 소년이었다.
열두 살, 초등학교 5학년이던 소년은 어느 날 마을 뒷산에서 나무 하나를 발견했다.
멋지고 근사한 나무가 아니라, 처참할 정도로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도끼와 낫으로 가지와 줄기를 거의 다 잘라버려 상처투성이가 된 등걸만 남은 느티나무였다.당시만 해도 모든 땔감이며 집 짓는 재료가 나무이던 시절이었다. 사람들은 산에서 나무를 베어가기 바빴고, 잘린 나무는 볼썽사나운 꼴로 밑동만 남아 있기 일쑤였을 것. 그 모습이 전혀 특별하지 않았을 텐데도 소년은 그 불쌍한 나무에 마음이 끌렸다. 근사한 나무가 아니라 다치고 버려진 나무여서 더 그랬던 모양이다.
소년은 친구들과 함께 낑낑대며 그 나무를 자기 집으로 옮겨다 심었다. 1932년의 일이었다.
소년은 나무를 정성껏 키우기 시작했다. 등걸에선 새 줄기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 줄기들을 보면서 소년은 묘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나뭇가지들을 엮고 잇는 특별한 모습을 만들자는 생각 말이다.소년이 버려진 나무를 자기 집에 가져다 심자고 생각했던 것은 잘리고 부러져 상처만 남은 나무가 마치 그때 나라 꼴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나무가 당한 수난이 우리 민족의 수난 같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던 것이다. 초등 5학년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놀라울 수도 있겠지만, 당시 사람들이 일제에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 생각해보면 그럴만도 하지 않았을까.
소년은 나무를 통해 뭔가 표현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나뭇가지를 얽어 모두가 힘을 합치는 모습, 서로 다른 가지들이 함께 이어져 공존하는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그래서 얼기설기 가지를 이어붙였다. 가지들은 신기하게도 한 몸처럼 붙었고 굵어져 갔다.
그리고 나무와 함께 소년도 나이를 먹어갔다. 초등 5학년 소년은 청년이 되었고 고향 서산에서 농촌지도자로 성장했다.나무는 점점 웅장해졌다. 어디서 들었는지 찾아와 나무를 팔라는 이들도 여럿이었다. 독특한 나무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비싼 값으로 팔 수 있겠다고 여긴 조경업자들이었다.
그래도 그는 나무를 팔지 않았다. 수십년 동안 키워온 나무는 자기의 분신과도 같았으리라.어느새 소년은 우리 나이로 일흔이 되었다.
잘린 나무를 가져다 키운 지 57년이 되던 해, 그는 이 나무를 떠나보내기로 했다.
평생 보살핀 이 나무가 진정 있어야 할 곳은 자기 집이 아니라 민족적인 곳인 독립기념관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그 소년 정헌갑 선생은 이 나무를 “조국 통일과 자주독립을 기원하는 평화의 상징”으로 키워달라며 기증했다.
그래서 나무는 1989년 4월, 서산을 떠나 독립기념관 ‘겨레의 집’ 옆 이 자리에 새로 터를 잡았다. 그리고 기증자 정현갑 선생의 바람대로 ‘단결과 평화의 상징수‘라는 이름이 붙었다.어느새 이 나무가 서산에서 이곳으로 온 지도 20년 넘게 흘렀다. 독립기념관의 터줏대감이 된 이 느티나무는 거대한 전시관 관람을 마치고 호젓한 숲길로 쉬러 온 관람객들을 반겨주고 있다.
독립기념관을 찾아오는 많은 이들 중에 이 나무를 만나고 가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전체 동선에서 살짝 옆으로 비켜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 나무는 우연히 발견한 보석처럼 더 강한 기억을 남긴다.저 나무를 보면 바로 옆 독립기념관 건물에 대해서 늘 생각해보게 된다.
독립기념관은 단순한 건축물을 뛰어넘는 실로 거대한 공간이다. 엄청난 넓이의 부지, 어마어마한 크기의 건물, 그리고 드넓은 주변 환경이 하나가 되는 초대형 구조물이다.
그 속에서 저 나무는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다. 그런데도 내 눈에는 광활한 독립기념관보다 저 나무가 더 좋게 보인다.엄청난 건축보다도, 압도적인 공간 연출보다도 나무 한 그루가 더 감동적으로 느껴지는 것, 그건 참 아이러니한 노릇이다.
독립기념관은 올해 광복절로 개관 25주년을 맞았다. 이 무지막지할 정도로 화끈함만 추구한 기념관이 문을 연 것은 1987년 8월15일이었다.
그리고 이 건물이 지어지게 된 것은 그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1982년 당시 한국은 반일 여론이 거세게 들끓고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일본이 역사교과서를 왜곡하면서 한국인들의 감정에 격하게 불을 질렀던 것이다.
사람들은 분노했다. 시민들의 분노는 정치인들에겐 기회다. 군사 쿠데타로 사람을 숱하게 죽이며 집권한 독재자 전두환 정권은 정통성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정권이다 보니 늘 사람들에게 위기의식을 불어넣어 정권을 유지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일본의 역사 왜곡도 그들에겐 좋은 정치적 계기였다. 일본에 대한 시민들의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분노를 이용해 전두환 정권은 독립기념관을 짓기로 한다.시민들의 의견은 반대도 많았다. 남들이 보면 우리가 나라가 없다가 1945년 식민지에서 해방되면서 비로소 생긴 신생국가로 오해할 수도 있다는 지적이 많았다. 미국처럼 새로 태어난 나라면 독립기념관을 짓겠지만 우리는 잠시 국권을 빼앗겼다 되찾은 것인데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었다. 전두환 정권 이전에도 몇 번 독립기념관 건립 이야기가 나왔지만 이런 이유로 흐지부지되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전두환은 북한을 빼면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재자였고, 그가 마음먹은 이상 독립기념관은 무조건 지어야 하는 것이었다. 1982년은 전두환이 쿠데타를 저지르고 대통령이 된 지 불과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전두환은 더욱 자기가 뭔가 하는 일을 보여줘야 한다는 마음이 강했다.
건립비용은? 국민 성금이 대대적으로 모였다. 정권으로선 나랏돈은 조금 쓰면서 온갖 생색을 낼 수 있는 기회였다.
곧바로 독립기념관 건립 발기대회가 열렸고, 초고속으로 건립이 추진됐다. 갑자기 어마어마한 땅을 찾아야 했고, 그걸 나라에서 사들여 전체 계획을 짜야 했고, 세부 건물 설계도 하고, 조경까지 해야 하는 강행군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리고 바로 이듬해 공사가 시작됐다. 의미 붙이기 좋아하는 한국 정치인 속성상 기공일은 당연히 광복절이었다.
세계 최대, 동양 최고 등의 헛된 숫자에 집착하는 유치한 습성으로 똘똘 뭉친 전두환 정권은 독립기념관의 핵심(이라기보다 그 자체에 가까울)인 ‘겨레의 집’은 무조건 크게 짓기로 한다. 윗 사진의 저 집이다.
그래서 ‘겨레의 집’은 높이 45미터, 길이 126미터, 앞뒤 67미터에 이르는 동양 최대의 기와집으로 탄생하게 됐다. 중국의 천안문보다도 더 큰 집, 정권은 신이 나서 이를 알려댔다.
집이 하도 크다 보니 저 사진 속에 보이는 현판도 동양 최대였다. 가로 9.4미터, 세로가 2.4미터나 된다.문제는 이 큰 집을, 그리고 저 넓은 기념관을 전두환 정권이 3년 만에 지어야 한다고 몰아친 것이었다.
원래 4년 공사(이것도 턱없이 짧은데도)로 1987년 개관할 예정이었는데, 전두환이 자기 치적으로 내세우는 1986년 아시안게임 이전에 완공해야 한다고 하는 바람에 1년이나 앞당겨지고 말았다. 말도 안 되는 것이었지만 전두환이 하라면 해야 했다. 공사는 미친 듯이 진행됐다.그러니, 잘 될 리가 없었다. 결국, 이런 일이 일어났다.
1986년 8월4일, ‘겨레의 집’ 공사 현장에서 불이 났다.
엄청난 불이었다. 저 건물 지붕은 흙을 기운 기와가 아니라 구리 기와였는데, 불길에 거의 모두 홀랑 다 타버리고 말았다.불이 난 시간은 밤 10시께, 개관을 앞두고 무리하게 공사를 야간에 진행하고 있다가 화재가 난 것이었다.
개관에 대통령이 참석하니 무조건 일정에 맞춰야 했고, 공사는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불이 난 8월4일은 광복절 개관을 겨우 11일 앞둔 시점이었다.다행인 점은 딱 한 가지, 목숨을 잃은 사람이 없다는 것뿐이었다.
민족 최고의 성지이자 국가 최대의 건축 공사에서 개관 직전 불이 났으니, 실로 국제적 개망신이었다.위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지붕 위쪽은 거의 몽땅 타버린 것을 알 수 있다.
세계 최대의 기와지붕집이니 높이가 실로 높았고, 그 바람에 소방 도구로 맨 위쪽까지는 물이 닿지 않아 피해는 더 커졌다. 어처구니없는 마인드가 만들어낸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이후 화재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면서 국민들은 실로 황당해질 수밖에 없었다. 전기 공사를 했던 작업자들은 무자격자들이었다. 최고 전문가가 해도 부족할 건물을 무자격자들이 한 것은 건설사가 하청에 하청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시공 과정과 관리 감독 양쪽에서 비리가 많다는 의혹이 거세게 일어났다.그러나 정권은 이 말도 안 되는 사고를 덮어버렸다. 전기 설비 하청업자와 뇌물 받은 말단급 몇명 구속하는 것을 끝이었다. 관리 부실 의혹이나 고질적인 하도급 문제는 건드리지도 않았다.
만약, 불이 며칠 뒤 개장 이후에 났다면?
온 나라에서 모은 독립운동에 관한 자료들이 모두 소실될 수도 있는 아찔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조무래기만 구속될 뿐, 저 엄청난 문제를 책임져야 할 이들은 한 명도 잡혀가지 않았다. 국민들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말이다.복구비용은? 최악의 거지 같은 시공으로 국가 망신을 시킨 시공사 대립산업이 전부 부담했다. 국민들의 분노가 컸고, 무엇보다도 대통령이 노발대발했으니 무마책으로 울며 겨자먹기로 부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저 사고로 독립기념관은 1년 뒤인 1987년 광복절 문을 열었다.정권 차원의 건물이었으므로 온 나라에서 단체 견학을 하느라 난리가 났다. 그리고 문을 바로 열자마자 독립기념관도 난리가 났다. 부실공사로 1년이나 연기되어 완공되었음에도 건물은 엉망이었던 것이다.
봉화대와 물 솟는 샘은 개관 이틀 만에 작동을 하지 않았고, 원형극장은 영사기가 고장났다.
행정처리도 그 못잖았다. 전시품 도록도 없이 개장해 관객들은 자료를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가 없었다.
개관 1주일 지난 뒤에는 물까지 터졌다. 폭우가 내리면서 갑자기 많은 물이 배수로로 흘러들어 배수관이 막혔고, 맨홀 틈으로 빗물이 분수처럼 솟구쳐 물바다가 됐다. 독립기념관은 개관 이후 신문 사회면에 실리기에 바빴다.이후로도 건물 유지는 늘 말썽이었다. 개관 7년여밖에 지나지 않은 1995년 국정감사 당시 자료를 보면 비 새는 곳이 무려 112곳. 한 건물에서만 30곳 새기도 했다. 완공은 말뿐이었고 개관 이후 보수 공사가 계속 이어지는 최악의 건물이었다.
공사 도중에 화재가 나서 온 국민을 경악하게 하고도, 시공 완성도는 개판이었던 것이다.그래서일까, 독립기념관을 가보면 이제 지은 지 25년인데 무척 낡아 보인다. 국가적 건물을 짓는 최소한의 양식과 양심이 실종된 건물이란 생각만 든다. 그 건축적 수준과 디자인은 말하기도 싫다.
독립기념관 화재는 대통령이 참석하는 개관식에 맞추기 위해 부실공사를 강행하는 후진국형 사고의 극치였다.
그리고 4반세기인 25년이 지났건만, 이 한심한 토건 문화는 여전히 바뀌지 않고 있고 그대로다.
지난 13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신축 공사 현장에서 불이 난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번에도 광복절을 이틀 앞두고서였다.지금이 전두환 시절도 아니고, 재벌회사 건설사들은 자기네가 세계 최고의 빌딩을 짓는다는 둥 허풍을 있는 대로 떠는 21세기에 똑같은 일이 그대로 벌어진 것, 이건 비극이 아니라 희극에 가깝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역시 대통령의 뜻에 의해 추진된 대형 국가 건축사업이었다.
대통령 임기 안에 완공해 대통령이 직접 개관 테이프를 잘라야 하므로 공사를 최대한 강행한다는 말이 미술계에 무성했다.
최근 여러 야당 국회의원들은 이번 화재가 대통령 관심 사항인 정권 차원 사업을 강행하는 과정에 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는 증거들을 공개하기도 했다. 실제로 공사를 맡은 GS건설은 야간 공사를 강행해오던 터였다.독립기념관은 전두환 시대라는 시대적 한계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과연 전두환 시대보다 나아졌을까?
더욱 안타까운 것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사고는 여러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점이다. 독립기념관 화재보다 더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문화관광부와 GS건설의 첫마디는 피해 규모가 크지 않아 공사 일정에는 차질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게 지금 한국 관료들과 재벌 건설사들의 마인드다.독립기념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의 화재는 아직 한국 사회의 수준이, 특히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권력자들의 마인드가 형편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 번 지으면 몇 백년을 쓸 건물을 자기 임기 내에 짓기 위해 강행하는 것, 이보다 더 비인간적이고 몰상식하고 비문화적인 생각도 없다.
수천억의 돈을 들여 짓는 건물들이 짓는 도중에도 문제고 지은 다음에도 문제라는 것이 그 증거다. 과연 국립현대미술관을 저렇게 강행해서 짓고 난 뒤 얼마나 완성도가 제대로 나올 수 있을까? 독립기념관처럼 하자 보수로 날을 지새우지나 않을지 실로 걱정스럽다. 두 곳 모두 국가 최고의 소장품들을 간직하는 곳인데 말이다.저 정성껏 가꾼 나무 한 그루는 그래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수천억원 들인 국가적 건물보다 이 나무가 내겐 더 수준 높은 작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 사람의 정성이란 실로 엄청난 것이다. 어쩌면 아무리 좋은 건축도 한 사람의 정성으로 키워낸 나무 하나보다 못할지도 모른다.건물은, 건축의 가치는 세계 최대의 규모, 세계 최고의 높이, 세계 최대의 공사비가 아니라 만드는 사람의 정성에서 나온다. 저 느티나무 하나를 키우는 데 소년 정헌갑은 50여년 세월을 바쳤다. 그 세월은 나무에 담겨 다른 나무에는 없는 특별한 것을 만들어냈다.
전두환과 이명박 정권은 국가적 건물 하나를 자기 임기 안에 보여주기 위해 3년여 만에 짓고자 했고, 지금도 짓고 있다.
한국을 대표할 건물이 3년 안에 지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에서 비극은 출발한다. 이런 정치 지도자들이 ‘하면 된다’는 무식하기 짝이 없는 생각으로 건축을 자기 치적용 마스코트로 여기며 추진하기에 한강에는 불필요한 섬이 번쩍거리며 등장하고, 사람 목숨까지 잃게 하는 공사 현장이 생겨난다.
허황된 랜드마크를 짓기보다는 차라리 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언제쯤 문화를 이해하는 정치인들을 볼 수 있을까. 저 나무를 볼 때마다 그 착잡한 생각이 되풀이된다.
구본준 기자